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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은 미국에서 백인과 스페인계 다음으로 많은 민족입니다. 13%를 차지하고 있어요. 1790년대 이들은 미국 인구의 19.3%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과거에는 인종차별로 화장실이나 버스도 흑인들 구역의 것만 사용해야하는 등 많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 현재는 인종 차별은 많이 줄어든 추세입니다. 하지만 신문기사를 보면 가끔 흑인들을 경찰이 과잉진압하는 등의 사건으로 흑인 시위가 종종 발생하기도 합니다. 흑인들은 미국 남부에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런 사건도 남부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흑인 인종차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시작

미국의 흑인은 보통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으로 불립니다. 이는 즉 아프리카에서 왔다는 뜻이지요. 1442년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흑인들은 유럽으로 팔려와 노예가 되었죠. 흑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원숭이로 본거죠. 이후 신대륙이 발견된 후 이주가 활발해지면서 1619년에 처음으로 흑인 노예가 미대륙으로 팔려왔고 1629년에는 본격적인 노예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남부에 새로운 식민지들이 설립되고 노동력이 필요로하자 1700년대 동안에 급속하게 노예 인구가 들어나고 1750년에는 약 20만명의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남부 개척자들이 넓은 땅을 개간하고 농작하려면 그만큼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그 노동력을 흑인 노예로 채우게 된 것이었죠. 남북전쟁 전후까지 미국 남부지방에서는 흑인 노예 노동을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면화를 재배했습니다.

 

남북 전쟁 발발

미국 북부는 자유 흑인들이 많았습니다. 영국과의 독립전쟁때 흑인들이 활약하여 독립에 성공하였고 이에 많은 흑인들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북부도 자유 흑인들을 아래의 사람으로 대접하며 많은 호텔, 레스토랑, 극장과 같은 공공 시설들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교회도 백인과 흑인의 자리를 따로 마련했습니다.

노예제도는 당시 북부와 남부간에 첨예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북부는 노예 해방을 남부는 노예 제도 유지를 주장하였습니다. 1860년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링컨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자 남부의 7개주가 독립합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미시시피, 플로리아, 알라바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수 순으로 1861년 2월까지 분리 독립합니다. 그리고 알라바마주의 몽고메리를 임시수도로 삼고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이라는 새로운 남부 국가명이 탄생하였습니다.

1861년 3월 4일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고 북부와 남부는 전면전에 접어듭니다. 북부는 20만명의 흑인들을 받아들여 북군에 합류시켰으며 남부는 흑인을 군인이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북군에 종사한 약 4만명의 흑인 군인들이 전사하였으나 1865년 4월 남부는 항복하였고 그해 12월 미국 헌법에서는 공식적으로 노예 제도를 끝냅니다.

 

자유의 첫걸음

Ku Klux Klan

 

남부의 많은 흑인들은 자유를 얻게 되었지만 집이 없고 가난한 그들을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했습니다. 많은 남부 백인들은 흑인들의 지위에 대해 마음에 안들어했고 흑인들을 상대로 폭력이 만연해졌습니다. 남부의 테네시주에서는 쿠 쿨럭스 클랜(Ku Klux Klan)이라는 단체가 생겨나서 흑인들과 흑인들을 후원하는 백인들을 살해하거나 폭행하였습니다.

 

인종차별의 증가

여전히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은 줄어들지 않았고 차별은 더 심해졌습니다. 1907년 안으로 모든 남부의 주에서는 열차, 교회, 학교, 호텔 같은 공공시설에 흑인과 백인의 사용을 분리하였습니다.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는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되었던 미국의 주법으로 남부에 있는 모든 공공기관에서 합법적으로 인종간 분리하도록 했으며 미국의 흑인들이 분리되었지만 평등하다는 사회적 지위를 가지게 했습니다.

인종분리로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경제적 후원, 주거지 등에서 열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사회 모든 범위에서 불평등을 낳았습니다. 남부에 이런 차별들로 1910년 초부터 흑인들이 북부로 100만명이 넘게 이주를 했지만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북부에 정착한 흑인들은 싸고 더럽고 버려진 주택 지구에 살아야 했으며, 큰 도시에는 흑인 빈민가들이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흑인 인권 운동

흑인 인권 운동의 대명사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가 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킹 목사는 인권 운동 단체와 협동하여 평화적 협회를 결성하여 인권 운동을 도왔습니다. 인종 차별에 대항하는 농성, 행렬들을 이끌어서 1960년 초반에는 이런 노력들로 공동 장소에서 차별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남부는 흑인들에게 동등권을 주는 연방 법률을 거부합니다. 마틴 루터 킹은 남부의 인종차별이 특히 심한 알라바마주의 몽고메리에서 약 3만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연방군의 보호를 받으며 셀마 몽고메리 행진(Selma Montgomery March)을 이끕니다. 불공평한 제한없이 흑인들이 투표권을 얻는 요청을 합니다.

이런 활동의 결과로 1964년 존슨 대통령이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964)에 서명하면서 흑인들은 법적으로 완전한 평등을 획득하게 됩니다. 1965년 투표권(Voting Rights Act of 1965)을 통과시키고 국가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흑인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1967년 서굿 마샬이 첫 흑인 연방 재판관이 되었고 칼 스토크스와 리처드 G.해처가 각각 흑인 시장으로 선출됩니다. 1968년 4월 4일 멤피스에서 킹 목사가 암살되었지만 존슨 대통령은 새 민권법(Civil Rights of Act of 1968)을 제정하여 주택매매와 임대시 차별을 금지합니다.

 

콜린파월(좌) 오바마(우)

 

이러한 흑인 인권 운동으로 점차 차별은 줄어들게 되고 흑인이 미국의 정부 요직에 선출되게 됩니다. 콜린 파월은 1989년 흑인 최초 협동참모 총장이 되고 2001년 흑인 최초로 국무 장관이 됩니다. 2009년에는 버락 오바마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죠.

 

하지만 아직도 차별은 존재

표면적으로는 인종차별은 법으로 금하고 있고 흑인, 백인 할 것 없이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아직도 이런 차별이 나타납니다. 미국내 흑인 뿐만 아니라 히스패닉, 동양계, 아랍계들도 은연중에 차별받고 있죠. 남부에서는 흑인들에 대한 경찰의 강경한 진압사건이 종종 벌어집니다. 2016년에 남부 미네소타에서 흑인 운전자를 불심 검문하는 과정에서 히스패닉계 경찰이 총격 사살하게 되는데 법원에서는 경찰에 대해 무죄로 판단했습니다. 무죄 판결이 내려지자 수 백명의 흑인 인권단체 회원들이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문구가 쓰인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최근 50년 사이에 흑인 인권이 상당히 많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갭은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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