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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페이버릿' 실제 이야기는?

category 카테고리 없음 2019. 3. 3. 17:44

2019년 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올리비아 콜맨은 '더 페이버릿(The Favourite)'에서 영국의 앤 여왕 역을 맡아 열연을 하였습니다. '더 페이버릿'은 아카데미상 10개부문 후보에 올라가서 여우주연상 하나를 수상하였죠. '더 페이버릿'의 줄거리는 18세기 영국이며 권력을 다투려는 사라와 애비게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실제 인물 비교

앤 여왕(Queen Anne) 올리비아 콜맨 역 

1665년 2월 6일 출생~1714년 8월 1일 사망

 

사라 처칠(Sarah Churchill, 말버러 공작 부인) 레이첼 와이즈 역

1660년 6월 5일 출생~1744년 10월 8일 사망

 

애비게일 마샴(Abigail Masham) 엠마스톤 역

1670년 출생~1734년 12월 6일 사망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 니콜라스 홀트 역

1661년 12월 5일 출생~1724년 5월 21일 사망

 

존 처칠(John Churchill, 말버러 공작) 마크 개티스 역

1650년 5월 26일 출생~1722년 6월 16일 사망

 

명예혁명과 권리장전

'더 페이버릿'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을 알아야합니다. 당시 영국의 왕 제임스 2세는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가톨릭을 옹호하려고 하여 이를 견제하는 의회에 의해 쫓겨나게 됩니다. 이를 '명예혁명'이라고 부릅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혁명에 성공했죠. 그 후 제임스 2세의 딸인 메리 2세와 네덜란드 귀족이었던 윌리엄 3세가 공동 왕위에 즉위하여 1689년 권리장전에 서명하고 왕권은 별다른 유혈충돌 없이 이양됩니다. 이를 통해 왕권이 약화되고 의회 민주주의인 입헌군주제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앤 여왕은 윌리엄 3세가 죽고 왕권을 잇게되는데 그 전의 일련의 사건을 통해 권력이 낮아져있는 상태였죠. 토리당과 휘그당의 힘이 강했으며, 의회의 승인없이는 세금을 올리거나 군대를 파병할 수 없는 왕권의 제한이 있었습니다.

 

2019/03/03 - [역사/세계사 사건] - 영국 명예혁명의 과정과 권리장전 결과

 

앤 여왕 즉위

앤 여왕은 제임스 2세의 딸이며 언니는 메리 2세입니다. 윌리엄과 메리 2세 사이에 아이가 없었기에 왕위 후계자로 주목받았죠. 그러나 1692년 제임스 2세가 총애하던 말버러 백작 존 처칠이 옛 왕 제임스와 극비리에 연락한 의혹을 받고 투옥되자 말버러가 앤의 친구 사라의 남편이어서 앤은 그 투옥에 반대하였고 앤과 메리 여왕의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메리 2세는 1694년 사망하였고, 단독 통치를 하던 윌리엄 3세가 1702년에 사망하자 앤은 여왕으로 즉위합니다. 앤 여왕이 즉위하였을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본격화되어 영국은 네덜란드와 함께 오스트리아와 동맹하여 프랑스 및 스페인과 싸우게 됩니다.

앤 여왕은 말버러 백작을 영국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플랑드르에 파견하였습니다. 말버러 백작은 혁혁한 성과를 거두며 말버러 공작에 서임되고 남 독일에서 벌어진 블렌하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스페인하고 싸움에서는 지브롤터를 함락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왕은 점차 평화 추진파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해서 전쟁 수행을 조언하는 사라를 싫어하게 되고 1710년 사라를 궁정에서 추방합니다. 같은 해에 행해진 선거 결과 평화 추진파의 보수당이 정권을 차지하고 말버러 공작의 군자금 횡령 의혹 조사를 하여 횡령이 확인되고 말버러 공작은 실각하였습니다.

 

말버러의 실각으로 스페인 계승전쟁은 평화교섭이 개시되어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고 이 조약으로 영국은 지브롤터 등의 여러 해외 영토를 획득하여 현재까지 영유하고 있습니다.

 

앤 여왕의 사실들

앤 여왕은 복부비만 체질로 어디를 가더라도 가마를 타고 다녔고 만년에는 전혀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비만이 진행되어 궁전 안을 이동할때도 휠체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1714년에 사망했을때는 관이 정방형이라고 전해질 정도에요. 관절에 생기는 통풍은 극심한 고통을 주었고 앉아서 생활하는 생활 방식 때문에 살이 쪘습니다. 또한 눈에 과도한 수분을 유발하는 눈 질환을 앓았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앤은 17번 임신했다고 나오는데 사실이 맞습니다. 그 중 5명을 출산하였는데, 4명은 두번째 생일 전에 죽었고 유일하게 남은 아이는 11살인 1700년에 사망했습니다.

 

앤 여왕 방에 실제 토끼는 키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픽션이에요.

 

사라와 앤의 우정

앤은 삼촌인 찰스 2세의 궁전에서 사라를 만났는데 그녀가 8세이고 사라가 13세일 때였습니다. 앤의 아버지인 제임스 2세와 사라의 아버지 요크 공작은 친한 사이였습니다. 그 후 앤과 사라는 그들은 친하게 지냈고 1683년 앤이 덴마크의 조지 왕자와 결혼했을때 궁녀가 됩니다. 그리고 1702년 앤이 왕위에 오르자 사라는 로브스(Robes, 왕실의 여성 최고 계급)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애완동물 이름으로 서로를 언급하였는데 사라는 '미세스 프리먼(Mrs.Freeman)', 앤은 '미세스 몰리(Mrs.Morley)'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사라는 실제로 앤의 재정과 친구들을 컨트롤 했습니다. 사라는 모든 것에 대해 조언을 했어요. 유창하고 명석한 사라와 달리 앤은 수줍은 성격에 즉흥적인 대화를 잘하진 못했습니다. 사라는 앤의 우정을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지루한 앤과 계속 얘기하는 것보단 지하감옥에 가는 것이 낫겠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앤 여왕은 성공회를 후원하며 평화를 지지하는 토리당(Tories)의 후원자였습니다. 반면에 사라는 전쟁을 지속하려는 휘그당(Whigs)의 지지자였어요. 영국에서 두번째로 파워있는 여자인 사라는 종종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앤을 짜증나게 만들었죠. 그리고 앤이 하인 애비게일에 대해 애정을 주게되자 사이가 더 악화되고 결국 왕실에서 쫓겨납니다. 사라와 애비게일은 사생활 측면보다는 정치적인 라이벌 색이 더 강했다고 합니다.

 

앤과 사라, 앤과 애비게일의 성적 관계

영화에서는 등장인물 사이에 동성애가 나오는데 역사학자들은 그런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영화의 몰입감을 더 고조시키려는 장치이지요. 앤은 남편에게 헌신한 기독교적 도덕의식이 강한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사라는 앤과 애비게일 사이의 레즈비언 관계가 있다는 시를 유포했는데 역사학자들은 진실보다는 질투에서 생긴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시는 아래와 같아요.

 

When as Queen Anne of great renown.

Great Britain’s sceptre swayed .

Beside the Church she dearly loved.

A dirty chambermaid

 

O Abigail that was her name.

She starched and stitched full well.

But how she pierced this royal heart.

No mortal man can tell

 

However for sweet service done.

And causes of great weight.

Her royal mistress made her, Oh!

A minister of state

 

Her secretary she was not.

Because she could not write.

But had the conduct and the care.

Of some dark deeds at night

 

달콤한 서비스(sweet service), 밤의 어둠속 행위(dark deeds at night)등을 통해 에비게일이 왕비와 그런 관계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화 그 후 사건

1710년 사라는 영궁에서 쫓겨나게 되고 그 자리를 애비게일이 차지합니다. 여왕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돈관리를 맡게 됩니다. 앤은 사라에게처럼 통제당하지 않으려고 애비게일에게 조심스럽게 대합니다. 애버게일이 앤여왕을 떠날까바 그녀의 지위를 그렇게 높이진 않습니다.

 

1714년 8월 1일 앤이 뇌졸증으로 사망하고 조지 1세가 즉위합니다. 애비게일 마삼과 그녀의 남편 사무엘은 궁전에서 쫓겨났습니다. 사무엘은 윈저에서 멀지않는 저택을 사들여서 가난하지 않게 살았습니다. 1734년 사망할때까지 애비게일은 그 시골집에서 살았습니다.

 

조지 1세와 말버러 공작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 함께 싸웠던 적이 있고 친분이 있었는데 조지 1세에 의해 말버러 공작은 다시 복권됩니다. 그리고 말보로 공작은 왕의 가까운 조언자 중 하나가 되죠. 존 처칠은 1722년 윈저에서 사망했으며 사라는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게 됩니다. 남편 사망 후 부동산에 투자하기도 했고 몇차례 결혼 제안도 받았지만 거절합니다. 사라는 1744년 84세 나이로 사망합니다. 영국의 영웅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과 다이애나 왕비가 사라 처칠의 후예입니다.